인간과 사랑을 노래하는 진중한 세계, <레미제라블>

lesmis01.jpg

 

‘처음’ 만나는 뮤지컬 <레미제라블>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세계 4대 뮤지컬 중에서 유일하게 정식 라이선스 한국어 공연이 없었던 뮤지컬 <레미제라블>이 드디어 무대에 올랐다. 1985년 영국 초연 이후 수없이 많은 세계인들의 마음속에 감동을 선사해 온 <레미제라블>은 늦어도 너무 늦게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한국 공연은 영국에서 초연 25주년을 기념해 2010년 선보인 새로운 버전으로 영국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팀이 내한해 사전작업부터 배우 오디션까지 직접 진행하며 열의를 보이고 있다. 특히 세계 4대 뮤지컬을 연출한 카메론 메킨토시가 주연배우에서 앙상블까지 모든 오디션에 참여해 가장 적합한 한국 뮤지컬 배우를 찾아냈다. 장기 프로젝트로 계획된 이번 공연은 원캐스트로 진행되기 때문에 공연의 완성도 측면에서 더욱 기대를 갖게 한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스팩(?)을 보자. 빅토르 위고의 원작 소설. 1980년에 프랑스에서 초연. 이후 카메론 메킨토시의 연출과 클로드 미셸 숀버그 작곡, 알랭 부브리 작사라는 드림팀의 조합으로 1985년에 영국에서 영어 버전으로 새롭게 등장해 범접할 수 없는 세계적 뮤지컬로 성장. 토니상, 그래미상 등 세계 뮤지컬 상 석권. 2012년 현재까지 가장 오래 공연 중인 뮤지컬. 이 정도가 바로 뮤지컬 <레미제라블>을 대변하는 것들이다. 바로 이 공연을 비로소 한국어 공연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처음’이라는 말은 그 어떤 상황과 만나도 설렘과 기대, 감동을 만들어낸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최초의 한국어 공연이라는 점과 함께 용인 포은아트홀의 개관 첫 작품이라는 점이 맞물려 뮤지컬 팬들에게 ‘처음’의 가치를 선물하고 있다. 영국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팀과 한국 스태프와의 협력이 빚어낼 이번 공연은 한국적 <레미제라블>의 명성을 쌓아나갈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뮤지컬 넘버들이 과연 한국어 가사로 어떻게 다가올 것인지, 그리고 정성화를 비롯한 배우들의 무대 장악력은 어떠할 것인지가 <레미제라블> 한국어 공연의 의의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lesmis02.jpg

 

‘장발장’이 아닌 ‘레미제라블’을 만나는 시간

프랑스에서 성경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다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은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최고의 문화유산으로 칭송받는 프랑스에서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장발장’이라는 이름은 아주 친숙하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장발장은 ‘빵 하나를 훔쳤다는 이유로 19년 동안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비운의 남자’ 정도로, 조금 더 나아가 ‘출소 후에 신부님의 가르침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는 정도로 알려진 한 편의 동화 속 인물이다. 물론 <레미제라블>을 제대로 읽은 독자들은 장발장의 삶을 둘러싼 프랑스 사회의 적나라한 비극적 현실을 이해했겠지만 보통 ‘장발장’이라는 캐릭터는 원작의 무한한 의미를 제대로 포함하지 못한 채 알려진 바 있다.

뮤지컬 <레미제라블>은 바로 이러한 ‘장발장’에 대한 부분적 지식을 폭넓은 온전한 이해로 안내한다. 장발장과 자베르 경감의 지독하게 반복되는 관계, 부조리한 현실의 희생양인 판틴, 인간에 대한 예의를 실천하기 위해 판틴의 딸 코제트를 홀로 키우며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장발장, 그리고 코제트와 사랑에 빠진 민중운동의 일원인 마리우스의 이야기가 모여 <레미제라블>은 1800년대 프랑스 사회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제목 그대로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레미제라블>은 박애, 용서, 구원, 자유, 사랑이라는 가장 인간적인 가치들을 노래한다. 개인이 감내하기 버거운 처참한 현실 속에서도 끝내 버릴 수 없는 인간적인 가치가 뮤지컬 넘버로 아름답게, 때로는 비장하게 들려온다. 때문에 공연이 끝나고 나면 그동안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장발장’은 사라지고 거대한 서사시와 같은 모습의 <레미제라블>이 가슴 속에 남겨진다. 인간의 가치에 대한 물음은 어쩌면 2012년 지금도 허름한 옷과 비참한 현실만 유행하는 옷과 번듯한 현실로 뒤바뀐 채 여전히 진행 중인지도 모른다.

 

lesmis03.jpg

 

완숙함과 신선함이 공존하는 무대

25주년 기념 버전에서는 빅토르 위고가 직접 그렸다는 그림을 무대 배경으로 활용하고, 컴퓨터그래픽을 통한 다양한 무대연출을 선보인다. 특히 장발장이 부상당한 마리우스를 데리고 지하도를 빠져나가는 장면에서 배경 그림과 CG 효과의 조화가 돋보인다. 스스로의 정의 관념에 혼란을 느낀 자베르 경감의 최후 장면 역시 영상기법의 활용을 통해 신선한 효과를 보여준다. 영국 오리지널 공연에서의 원형무대는 볼 수 없지만 새로운 버전의 무대연출도 극의 완성도 구현에 톡톡히 한 몫을 담당하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민중들이 만들어놓은 바리케이트가 무대를 가득 메운 장면이다. 무대 안쪽 보이지 않는 방향을 향해 세워진 바리케이트는 민중들의 최후의 방어선인 동시에 비참한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마지막 생명선이다. ‘바리케이트’의 현대적 의미가 바로 이 장면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최후를 맞이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숭고한 희생의 가치를 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공연 내내 무대의 조명은 어두운 톤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레미제라블>의 진중한 세계관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무겁고 암습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조명 연출 역시 이러한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오케스트라의 처연한 선율이 만나 장발장을 비롯한 가련한 사람들의 힘겹고 고통스런 삶의 모습이 무대 위에 고스란히 형상화되고 있다. 그리고 장발장이나 에포닌 등이 홀로 노래하는 장면에서는 명암의 확실한 대비를 통해 배우를 보다 부각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조명과 무대연출이 돋보이는 장면 중 하나는 장발장과 코제트, 마리우스가 무대 좌우에서 삼각구도를 이루며 노래하는 부분이다. 짙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받으며 노래하는 배우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빛을 보내며 이상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리고 바리케이트가 무너져 많은 이들이 죽은 후 12개의 촛불이 무대 곳곳에 배치되고, 홀로 살아남은 마리우스가 구슬피 노래하는 장면도 매력적이다.

 

lesmis04.jpg

 

가장 매력적인 캐릭터를 찾아라

이번 공연 무대에 오르는 뮤지컬 배우들은 오리지널 연출가 카메론 메킨토시가 직접 오디션을 통해 선발했기 때문에 한국형 <레미제라블>에 최적화된 배우들이라 말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돋보이는 캐릭터는 단연 장발장과 자베르 경감이다.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중심축을 이루는 두 캐릭터의 완벽한 구현을 위해서는 두 배우의 호흡과 대립, 갈등이 효과적이어야만 한다. <맨 오브 라만차>와 <영웅>을 비롯한 다수의 뮤지컬에서 이미 힘든 현실을 이겨내는 중심 캐릭터를 완벽하게 연기한 바 있는 정성화는 이번에도 장발장을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어낸다. 정성화는 배우가 홀로 빛나는 대신 무대 위에서 극 중 캐릭터가 조화를 이루며 빛을 발하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준다. 공연이 시작하고부터, 그리고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배우 정성화의 얼굴과 이미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연기하고 노래한 고난을 이겨내며 성장해가는 장발장만이 오롯하게 살아 있다.

장발장을 감옥에 가두고, 출소 후에도 그의 행적을 뒤쫓는 자베르 경감을 맡은 문종원 역시 존재감을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오리지널 공연팀의 사진 속 캐릭터와 유사한 느낌까지 보여주는 자베르 경감은 1막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불쌍한 코제트를 부려먹던 여관주인에서 좀도둑으로 변질되는 떼나르디에와 그의 부인 역은 임춘길과 박준면이 맡아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을 위협하는 부정적 캐릭터이면서도 극 중에서 유일하게 웃음을 선사하는 이중적인 면모를 그려낸다.

이번 공연에서 돋보이는 캐릭터 중 하나는 바로 슬픈 외사랑을 하는 캐릭터 에포닌이다. 뮤지컬 배우 박지연의 청아한 목소리는 허름한 옷차림을 하고 비극적 상황 속에 빠진 에포닌이 감당해야 하는 외사랑의 아픔을 매력적으로 표현해낸다. 그리고 리틀 코제트와 거리의 소년 가브로쉬 역시 맑고 순수한 고음으로 비극적 현실과 대비되는 노래를 통해 극적 긴장감을 부각시키는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 어두운 조명과 부분적인 빛의 활용이 만들어내는 비장함은 비참한 현실 속에서 맑고 순수함을 유지하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통해 보다 비극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lesmis05.jpg

 

에필로그 – 뮤지컬 <레미제라블> 관람법

먼저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와 같은 공연을 본 사람들에게는 극 전체가 노래로만 구성된 방식(Song Though)이 별 문제 없겠지만, 대사 없이 노래로만 전개되는 <레미제라블>은 조금은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극의 흐름에 빠져들 수 있으니 걱정은 필요 없다. 대사와 노래의 연결과는 사뭇 다른 자연스러움과 매끄러운 장면 장면의 맛을 느낄 수 있다. 둘째,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레미제라블>의 오리지널 뮤지컬 넘버를 접하고 매력을 느꼈다면, 처음 접하는 한국어 가사의 뮤지컬 넘버가 어색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리지널 버전의 노래나 수전 보일의 음성과 비교하려 하지 않고 차분히 감상을 하다보면 한국어 노래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셋째, 많은 흥행 뮤지컬들의 경우 극의 중간 중간 웃음을 유발하는 장면과 노래들이 배치되어 있어서 긴 공연 시간 동안 관객들도 적절한 호흡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레미제라블>은 담고 있는 내용에서부터 그 주제를 표현하는 무대연출과 조명, 음악까지 전체적으로 무게감이 있는 어두운 톤을 유지한다. 물론 떼나르디에 부부가 등장해 약간의 웃음을 유발하기는 하지만 전반적으로 비장미가 바탕에 깔려 있다. 때문에 <레미제라블>을 관람하기 전 반드시 이러한 공연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

 

리뷰어 하린(thestream@thestream.co.kr)
변화의 모티브, 문화전문웹진 더스트림(C) 동일조건 하에 사진 배포, 기사 미리보기 허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