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The Bench’, 반짝이는 삶의 작은 순간들, 그곳에 벤치가 있었다.

bench02.jpg

 

여기 하나의 풍경이 있다. 벤치,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왠지 벤치라고 하면 당연하게 떠오르는 모습의 그런 벤치가 있는 풍경. 좁은 연극무대는 단지 이 친숙한 벤치 하나가 자리하는 것만으로 일상적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바로 이 친숙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낯익은 삶의 모습과 낯선 표현방식이 겹쳐지며 연극 가 만들어진다.

는 벤치가 놓여진 공간에서 벌어지는 각기 다른 9개의 에피소드(프로그램에서 소개된 ‘세 남자’ 에피소드는 공연당일 볼 수 없었다)를 통해 삶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 시각은 결코 설명적이지 않은데, 이는 최대한 언어를 절제하고 몸의 움직임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기 때문이다. 또한 몸짓언어 대신 차분한 대화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놓는 에피소드에 있어서도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한 직조를 통해 의도하고자 하는 바를 얼핏 드러낼 뿐 직접적인 표현을 하지 않아 관객들은 긴밀한 관찰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bench01.jpg

 

이 연극의 에피소드를 거칠게 세 부류로 나누면 조금은 아방가르드적인 몸짓언어를 통해 함축적인 전달을 꾀하는 ‘긴 여행’, ‘도시 속의 벤치’가 있고, 등장인물 간의 대화를 통해 가볍고 경쾌하게 이야기를 풀어가는 ‘엄마와 딸’, ‘소풍’, ‘해질녘’, 그리고 몸짓언어를 이용하면서도 대중적 재미와 감성을 살린 ‘이상한 정신세계의 앨리스’, ‘비와 신문’, ‘비와 슬러시’가 있다. 이들 각각은 결코 유기적으로 연결되진 않지만 벤치라는 – 특별히 명시되어 있진 않지만 아마도 도시 속의 벤치 – 공간적 유사성 속에서 삶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준다. 즉 일반적 극이 인생의 총체성이 드러나는 하나의 선 굵은 플롯을 통해 삶의 리얼리티를 확보한다면, 는 각각의 삶의 조각들을 나열하며 모자이크 같은 불균등한 총체성을 확보한다.

하지만 나열되는 에피소드의 순서에 있어서는 정중동의 배분이 확실한데, 특히 가장 난해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을 찌르는 ‘긴 여행’이 극의 서두에 배치되며 관객은 앞서 언급한 긴밀한 관찰자의 역할에 집중하게 된다. 죽은 누군가의 장례행렬과 그들의 슬픔을 형상화한 안무는 특유의 낯설음을 통해 관객을 긴장시킨다. 수많은 에피소드 중 벤치라는 소품과 가장 연관성이 적은 이 에피소드가 극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것은 일종의 룰을 관객에게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즉 ‘이 연극은 이처럼 일상적이지 않은 몸짓언어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으니 당황하지 말고 잘 관찰하시오’라고 관객에게 무언(無言)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덕분에 관객들은 가장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풀어나가는 에피소드에서조차 등장인물의 몸짓 하나하나에 집중하게 되고, 대중적 감수성에 맞춘 안무에서 쉽게 의도하는 바를 추출해낼 수 있게 된다.
‘긴 여행’ 이후 이기 팝의 ‘Lust for life’의 경쾌한 리듬과 함께 도시 속 삶의 풍경을 안무로 풀어낸 ‘도시 속의 벤치’가 극의 분위기를 상승시키면, 등장인물들의 일상적 대화를 통해 삶의 따뜻하고, 조금은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풀어내는 ‘소풍’, ‘엄마와 딸’이 뒤를 잇는다. 이후 벤치라는 소품의 이용에 있어선 가장 성공적이고 대중적 안무를 선보이는 ‘이상한 정신세계의 앨리스’가 극 초반에 등장했던 몸짓언어와 다른 일상적 에피소드에서 더러난 대중적 재미의 성공적 결합을 이끌며 주인공들의 대화에 젖어있던 관객들에게 다시 한번 신선한 충격을 준다. 다시 제목 그대로 해질녘 노을의 은은함이 유머 속에서도 은근하게 배어나오는 ‘해질녘’이 뒤를 잇고, 극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비와 슬러시’를 예비하는 ‘비와 신문’, 그리고 젊은 남녀의 만남이란 상큼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언어의 표현은 최대한 자제한 ‘비와 슬러시’가 대미를 장식한다. 마지막 에피소드 ‘문 밖의 벤치’는 첫 에피소드 ‘긴 여행’이 일종의 프롤로그 역할을 맡았듯, 잔잔한 에필로그로서 극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다.

 

bench03.jpg

 

이처럼 다양한 에피소드를 불균등하게 나열하면서도 유연하게 리듬을 탄 덕에 연극 는 유기적인 하나의 극으로서 효과적 완결을 이룬다. 또한 연기와 안무의 하이브리드를 통한 표현방식은 관객의 끊임없는 집중과 관찰을 요구한다.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집중은 오히려 극에 흠뻑 빠져들어 극의 흐름에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막아주며 관객과 극의 거리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거리감을 통해 관객들은 극이 말하고자 하는 바들을 천천히 곱씹을 기회를 얻게 된다. 이러한 반추를 통해 벤치에서 펼쳐진 짧은 이야기들은 좀 더 긴 생명력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위근우 기자(guevara99@thestream.co.kr)
변화의 모티브, 문화전문미디어 더스트림 (c) 무단전제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