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팸어랏] 뮤지컬의 정석을 비트는 한국형 웃음 코드

spam01.jpg

 

아더왕과 성배이야기는 영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신화로 영국을 구한 아더왕의 영웅심과 기사도정신이 이야기의 중요한 요소이다. 뮤지컬 <스팸어랏>은 이러한 아더왕의 신화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기존의 아더왕 이야기에서 필수적인 요소들은 쏙 빼고 대신 코미디와 패러디로 가득 채웠다. 아더왕과 그의 용맹한 기사들을 말을 타는 대신 코코넛을 뚝딱거리며 다니는 인물로 만들어버리고, 성배를 찾는 여정도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있다. 어찌 보면 건방져 보이기까지 하는 패러디에 쉼 없이 터지는 B급 개그와 냉소적인 풍자를 섞어 감동과 눈물이 가득한 타 뮤지컬들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스팸어랏>이라는 제목도 아더의 이름인 ‘캐멀롯’에 쓸 데 없고 귀찮은 것의 대명사로 불리는 ‘스팸’을 섞어 만든 합성어로 이미 제목부터가 발칙하기 이를 데 없다. 멋진 넘버들과 화려한 안무, 감동적인 스토리를 기대하며 극장을 찾던 관객들에게 멋진 것 같은데 잘 들어보면 웃음이 나오는 넘버, 화려한 것 같은데 어딘가 우스운 안무, 감동조차도 웃음소재로 쓰는 스토리를 보여주며 신선한 즐거움과 큰 웃음을 선물한다.

 

spam02.jpg

뮤지컬의 정석을 비틀다

어느 정도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웬만한 뮤지컬 작품들에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흐름이나 결말, 넘버의 구성 등에 많은 뮤지컬에서 따르고 있는 정석이 존재한다. 꼭 빠지지 않는 아름다운 사랑노래, 주인공의 고난, 그 고난을 이겨낸 해피엔딩이 그 중 하나이다. 정석은 작품성 있는 뮤지컬의 증명서라고 할 수 있지만 천편일률적으로 같은 형태를 띤 뮤지컬들이 늘어난다면 그런 작품들은 식상해지고 창의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스팸어랏>에서는 굳어져 있는 뮤지컬의 정석을 비틀며 그것으로 코미디를 만들어낸다. 이미 익숙해져 많은 곳에 쓰이고 있는 뮤지컬의 클리셰를 개그의 소재로 삼아 웃음 이면에는 적나라한 풍자가 숨어있다.
뮤지컬의 중반부와 대미를 장식하는 사랑의 아리아는 <스팸어랏>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허름한 차림의 거지에서 멋진 훈남 기사로 변신한 갈라하드 경과 신비롭고 아름다운 호수의 여인이 함께 등장하며 서로를 안고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이 작품에서 손꼽을 만한 명장면 중 하나다. 로맨틱한 분위기를 만드는 조명과 세트, 우아하고 높은 음이 많은 선율은 기존의 뮤지컬들과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두 배우들이 진지하게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자세히 들어보면 웃음을 참을 수 없다. 무드란 무드는 다 잡아놓고 서로의 사랑이 아니라 웬만한 작품에는 꼭 나오는, 부르기 힘든 사랑의 노래에 대해 열창한다. 무대 위의 분위기와 상반되는 가사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며 큰 웃음을 유발하고 풍자를 더욱 부각시킨다. 이 장면을 필두로 작품 내내 정석을 비튼 풍자가 계속 이어진다. 관객들이 즐겁게 웃을 수 있는 것이 <스팸어랏>의 큰 묘미이지만 은근히 숨어 있는 풍자를 찾아 냉소적인 웃음을 짓게 하는 것도 이 작품이 가진 매력이다.

 

spam03.jpg

 

무대 위 세계와 무대 밖의 세계를 넘나들다

2막 중반에 1막에서 아더왕과 기사들을 인도했던 호수의 여인이 화려한 옷을 벗고 여배우의 상징인 가운을 걸치고 나타난다. 이 장면에서만큼은 호수의 여인이 아니라 그 배역에 캐스팅된 배우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른다. 노래의 내용은 자신의 출연이 너무 적다고 배역에 불만을 나타내는 것. 열심히 성배를 찾고 있는 중에 갑자기 작품 밖의 세계가 끼어드는 것이다. 진행되는 이야기를 자르고 들어오는 뜬금없는 상황과 1막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호수의 여인에 웃음이 절로 나온다. <스팸어랏>에서는 뮤지컬이 진행되는 중에 배제되어야 하는 무대 밖의 세계를 의도적으로 집어넣으면서 웃음을 만든다. 작품에서 하고자하는 말이 아더왕이 사는 허구의 세계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작품 밖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겁쟁이 로빈경이 아더왕에게 뮤지컬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에서는 무대 밖의 세계가 도중에 끼어드는 것을 넘어서 작품의 이야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이미 그 당시에 있지도 않던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주인공들의 입에서 언급된 것에서부터 무대 밖과 무대 위가 구분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어서 다른 유명 뮤지컬들을 패러디하며 연예인 캐스팅이 일반화되어가는 뮤지컬계를 풍자한다.
무대 위와 밖의 구분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스팸어랏>의 특징은 성배를 찾는 장면에서 빛을 발한다. 성배가 있는 장소가 바로 그것이다. 성배가 숨겨져 있는 일명 ‘성배석’은 배우가 마음 가는 데로 정하는 것이라 매 공연마다 성배석이 다르다. 게다가 성배석에 앉아 있던 죄(?)로 무대 위에 끌려나오는 관객도 매번 다르기 때문에 이 장면에서는 배우들의 애드립으로만 진행되어 언제나 다른 내용이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봐도 새로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스팸어랏>의 가장 큰 장점이다. 관객참여가 어려운 대극장 뮤지컬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신선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뮤지컬을 풍자하는 것에 비해 <스팸어랏>도 그 뮤지컬들과 비슷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 연예인 캐스팅에 대해 비판하는 넘버를 부르면서 연예인을 캐스팅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게다가 뮤지컬에 문외한인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은 것도 호불호가 갈리는 요인이 되었다.

 

spam04.jpg

 

빵 터지는 한국형 웃음코드, 그리고 배우들

<스팸어랏>은 본디 브로드웨이 뮤지컬이기 때문에 미국의 정서에 맞는 개그가 가득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며 크게 웃을 수 있는 이유는 극 전체를 한국에 맞는 웃음코드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아더왕과 기사들이 주고받는 애드립은 받아들이기 쉬운 가벼운 말장난이어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쳇말로 빵 터질 수가 있다. 뮤지컬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라는 단점도 이 끝없이 터지는 말장난과 애드립으로 커버가 된다. 전국민이 다 아는 ‘생각대로 T’ 광고 씨엠송을 패러디한 점도 철저히 한국관객의 시각에 맞춘 개그이다. 아더왕과 기사들이 프랑스인들에게 조롱을 당하는 장면에서도 프랑스어와 한국어를 섞은 언어유희를 아주 잘 살려냈다.
그리고 풍자하는 내용도 어느 정도 한국 실정에 맞춰 바꿔놓았다. 사실 연예인 캐스팅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은 원작에서는 뮤지컬 시장을 독점하는 유태인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노력으로 <스팸어랏>의 한국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시체를 치우는 씬이나 기사들이 캐멀롯에서 노는 장면에서는 부족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피폐한 영국에서 시체를 팔아치우는 비인간적인 장사가 행해졌었던 사실과 캐멀롯성에서 원탁에 모여 기사도정신으로 무장해야하는 기사들을 향락에 빠진 인간들로 바꿔놓은 것을 미리 알고 있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극 전부를 풍자와 패러디로만 웃기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원작에 비해 가벼운 개그와 애드립을 강화시켰다. 이것은 관객들의 웃음을 보장하는 장점인 동시에 <스팸어랏>이 가진 ‘블랙코미디’로서의 정체성을 흐리는 단점이기도 하다.
작품의 주인공은 아더왕이지만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힘을 지닌 배우는 호수의 여인을 맡고 있는 신영숙이다. 관객들의 많은 신뢰를 받으며 이제 명실공이 흥행배우가 된 아더왕 역의 정성화가 하차하고 나서 그의 자리를 신영숙이 대신하고 있다. 말 그대로 폭발적인 가창력과 아낌없는 표정연기가 그녀의 존재감을 높이 띄운다. 아더왕 역의 박영규는 기대 이상의 실력을 보여준다. 가창력도 일품인데다가 노련한 그의 개그연기는 아더왕에 딱 들어맞는다. <스팸어랏>에서 가장 자신의 재능을 꽃피운 배우는 정상훈이다. 애드립과 말장난 개그에서 그를 따라올 자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사 랜슬롯경과 더불어 니의 기사, 마법사, 프랑스병 등을 연기하며 작품 요소요소에서 큰 웃음을 이끌어낸다.

<스팸어랏>은 훌륭한 뮤지컬은 아니더라도 즐거운 뮤지컬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배우들의 입담과 여기저기 숨겨진 풍자들이 웃음을 준다. 맨 앞줄에 앉아 성배석으로 지정받는 영광과 스팸 한 상자를 얻는 행운을 노려보는 것도 이 작품 감상의 포인트이다.

 

김솔(thestream@thestream.co.kr)
변화의 모티브, 문화전문웹진(c)동일 조건 하에 사진배포, 기사 미리보기 허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