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극의 태풍] 판타지의 거장, 경극을 조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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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페스트Tempest>는 셰익스피어의 후기작으로 마지막 희곡이라 알려져 있기도 하다. 환상적인 요소가 가득한 낭만희곡인 만큼 작품의 판타지를 실제로 완성도 높게 보여주는 것은 쉬운 작업은 아니다. 특히, <템페스트>에서 가장 비중 있는 부분은 극의 초반부 프로스페로의 마술과 에어리얼의 능력에 의해 배가 난파당하는 장면이다. 큰 스케일을 통해 관객을 압도한다면 이후 이어지는 극의 흐름에 몰입시키는 것이 수월할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밋밋함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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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극에 대한 기대치, 그리고 경극에 담은 셰익스피어

제3회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 개막작 <태풍>은 이런 면에서 관람 전부터 큰 기대를 갖게 만들었다. 연출을 맡은 서극의 이름을 보는 순간부터 말이다. 1980~90년대 홍콩영화를 즐겨 보았던 사람이라면 <소오강호>(공동연출), <동방불패>, <천녀유혼>을 만든 그가 지금의 기준에서는 허술해 보이겠지만(개인적으로 전혀 허술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얼마나 아름답게 판타지를 그려내는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인정할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다른 작품도 아니고 템페스트가 서극 감독과 만났다면 이 둘은 천생연분처럼 딱 들어맞는 조합이 아니겠는가.

경극이라는 것이 세계적으로 아니 적어도 우리나라에 알려지게 된 것은 영화 <패왕별희>를 통해서일 것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장국영의 짙은 화장 속 슬픔이 찬 얼굴과 함께 높은 고음으로 이어지는 대사 화려한 의상과 절제된 몸짓은 당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워낙 유명한 고전인 탓에 여러 가지 재해석을 통해 무대화되었던 템페스트가 대만 경극의 대표 극단인 당대전기극장의 <태풍>에서 어떻게 표현될 것인지 기대가 되었다. 해오름극장과 같이 큰 무대 속에서 경극이 어떻게 펼쳐질 것인가 자못 궁금하기까지 했다. 태풍 예술감독이자 대만의 국민배우인 우싱 꾸오 (吳興國, Wu Hsing-kuo)가 연기 중에 왼손을 다쳐서 움직임이 원활하지 않아 양해를 구한다는 방송과 함께 극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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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극, 은막을 나와 무대에서 붓을 들다

스모그와 함께 마치 소오강호의 노래 한 구절처럼 들려오는 템페스트의 대사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잠시 후 생각 보다 높은 고음으로 불리워지는 노래 소리는 ‘경극 뭐 장국영이 보여주던 그런 거잖아’하고 대책 없는 친숙함을 갖고 객석에 앉아있던 관객들을 당황케 했다. 하지만 이도 잠시, 무대 위는 태풍 속에 휩싸인 사람들의 공포와 격정을 그대로 담아내 보여주었다. 평면적인 무대를 입체적으로 구성하기 위해 긴 천을 세로로 늘어뜨리고, 다양한 색의 조명을 통해 혼란함을 표현했다.

<태풍>의 무대와 의상을 책임진 팀 윕(葉錦添, Tim Yip)은 이안(李安)감독의 영화 <와호장룡>의 미술감독 및 의상디자인을 담당하여 오스카상을 받기도 했다. 최근작으로는 펑샤오강(馮小剛)감독의 <야연(夜宴)>, 첸카이거(陳凱歌)감독의 <무극(無極)>, 장이모우(張藝謀) 감독의 <십면매복(十面埋伏)> 등 요즘의 중국영화 중에서도 비주얼의 화려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품을 거의 다 담당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태풍>에서는 의상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대신에 무대는 오히려 심플하게 이루어져 있다. 여백의 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극의 전통을 살리면서도 환상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한 노력이 성공을 거두었다. 순백의 긴 천을 무대의 입체감을 살려주고 있고 나무의 형상이나 프레스페로가 올라있는 언덕의 형상 등을 보여주는 이동식 오브제로 부피감을 놓치지 않고 있다. 여러 요소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띠는 것이 상형문자인데, 마법사의 가운에도 새겨져 있고 풍랑을 일으키는 장면에서도 등장하고 제의 장면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쉬지 않고 꿈틀거리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도 시각적으로 임팩트 있는 효과를 거두었다. 무대와 의상이 조화롭게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프로스페로는 직접 마법을 펼치지 않는다. 이것은 당시 마법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에 따른 것으로 마법은 에어리얼을 통해서 가능하다. 원작의 내용을 비교적 충실히 따르고 있는 <태풍>에서는 비록 프로스페로 역의 우싱 꾸오가 손을 다쳤다고는 해도 극에 무리가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공연 내내 무게감있는 역할을 소화해 낸 우싱 꾸오의 연기를 대체할만한 연기자는 쉽게 찾기 힘들어 보였다. 21명에 달하는 경극배우들 또한 출연하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에어리얼과 페르디난드 역의 배우들이 도드라졌다. 에어리얼은 다양한 움직임 속에서도 유려한 연기를 보여주었고, 페르디난드 역의 남자배우는 전통적인 경극의 연기 양식의 절제된 움직임을 선보였다. <태풍>이 기본적으로 음악극이기 때문에 가창력이 연기의 바탕이 됨을 언급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오랜 기간의 훈련으로 잘 다져진 실력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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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적 음악극(뮤지컬)의 가능성 열기

1부와 2부로 나누어진 공연 중 2부의 시작과 함께 등장하여 다양한 아크로바틱을 선보인 배우들 또한 관객들의 호응을 끌어냈다. 한국어 대사 등을 통해 호응을 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다소 불안하게 보이는 동작들도 있었다.

당대전기극장의 <태풍>은 공연의 대형화를 꿈꾸는 아시아 공연 흐름의 한 형태일지도 모른다. 오랜 전통을 지닌 장르로서의 경극이 지닌 형식미는 고전에 적용되었을 때 상당히 긍정적인 효과가 기대된다. 전통 예술에서 일급의 기량을 지닌 예술가의 탄생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과 역경이 필요한 법. 21명의 연기자가 고른 기량이 있었다면 좀 더 풍성한 무대가 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도 남았다.

 

 

한명섭 공연평론가(igotnext@thestre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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