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락 햄릿 언플러그드] 햄릿의 비극, 축제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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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굳이 햄릿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이 말을 내뱉곤 한다. 그 상황은 햄릿처럼 죽음과 직면하고 있을 수도 있고, 점심에 한식을 먹을까 중식을 먹을까 하는 사소한 일일 수도 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점심에 무엇을 먹어야 할지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의 상황은 중대한 것부터 사소한 것까지 모두 비극적이다. 무엇을 선택하든 다른 무엇 하나는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의 선택에 후회 없고자 하는데,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최선의 선택이었던 길이 오히려 슬픔을 안겨준다면? 그렇다고 다른 것을 선택할 여지는 없다. 비록 슬픔을 안겨준 선택이지만 당시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지 않았는가? 허나 햄릿의 선택이 그러했던 것처럼 최선의 선택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애초에 행복을 선택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선택해야 하는 삶은 곧 공포다. 매 순간이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삶에서 선택의 결과를 어찌할 수 없음은 햄릿의 우유부단함을 만들고, 우리네의 두려움을 자극시키는 비극을 만든다.

하지만 무엇이든 과하면 오히려 좋지 않은 법! 처음에는 ‘카다르시스’라는 이름으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정화시켜주던 햄릿의 비극은 너무 오랜 시간동안 무수히 반복되어, 그 기능이 점점 옅어졌다. 많은 사람들이 햄릿의 괴로움을 느끼기 보다는 그의 형식을 읽고 외우는 데만 급급하다보다, 거론되는 햄릿은 빈 껍데기 뿐이며, 그 햄릿은 오히려 우유부단한 햄릿보다 더 안쓰럽고 쓸쓸해 보인다.

2006년 여름,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또 하나의 햄릿, 언플러그드 뮤지컬 <2006 락 햄릿> 역시 그의 고뇌를 온전히 담아내기에는 다소 부족한 듯 보인다. 무대 위에서 절규하고 있는 햄릿보다 무대 위 작은 영상에서 보이는 햄릿의 절규가 더욱 절절하다. 인물들의 흐트러진(!) 복장에서 절망에 빠진 햄릿을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다. 헌데 이 뮤지컬은 오히려 햄릿을 즐겁게 만들고 싶어서 그렇게 했다고 한다. ‘2006’과 ‘햄릿’ 사이에 놓인 락이 樂을 의미할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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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락 햄릿>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창창한(?) 청춘들이다. 외모는 어리지만 어딘가 애늙은이의 향내를 풍기던 다른 햄릿들과는 달리 이들의 모습에는 청춘들의 활기찬 모습이 묻어난다. 이들의 활기참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쩌지 못하는 운명마저도 지우지 못한 것 같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어머니와 삼촌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결국 사랑하는 여인과 그녀의 가족마저도 파멸시키는 햄릿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중에도 ‘즐거운 햄릿이 난 좋아.’를 외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눈치 없는 이 외침은, 눈치 없음을 가리기 위해 리듬을 뒤집어쓰고 나와 보는 이들의 마음을 교묘하게 파고든다. 이 공연에는 엄청난 고뇌의 흔적을 절실하게(!) 보여주는 긴 문장의 쏟아짐이 없다. (고뇌의 문장들은 햄릿의 고통이 다가오기도 전에 얼마나 나를 괴롭혔던가!) 대신 언플러그드 뮤지컬답게 즉석에서 연주되는 악기들의 선율에 <2006 락 햄릿>의 청춘들은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실려 보낸다. 비록 처절한 문장의 나열은 없지만, 운명 앞에 선 인물들의 어쩔 수 없는 비극은 절절한 선율 안에서 더욱 애틋하게 피어오른다.

물론 절절한 선율만 있는 것은 아니다. ‘樂’ 뮤지컬답게 흥겨운 선율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각 캐릭터들에게 활기를 띠게 한다. 극이 너무 우울함으로 흘러갈 때에는, 고대 희극이 비극 사이에서 탄생했던 것처럼, 다시금 ‘락, 락, 락, 락햄릿’을 외치며 호흡을 가다듬고 다음 이야기를 준비한다.

청춘들의 비극을 전하는 리듬에서 동양과 서양의 소리가 조화를 이루는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첼로, 건반, 기타, 베이스, 드럼 사이에 우리의 악기가 대금 단 하나만 들어있다는 것이 조금 질투 나기도 하지만, 미쳐버린 오필리어의 ‘만전춘별사’와 모두가 함께 부르는 ‘제망매가’는 저 멀리 낯선 땅에서 온 <햄릿>에 동질감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선 고전의 힘!’을 느끼게 한다. 그 절묘함이 얼마나 딱 떨어지는 지, 만전춘별사의 작가와 월명사가 마치 햄릿을 두고 각자의 작품을 쓰지 않았나, 혹은 셰익스피어가 우리나라의 향가를 알고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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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뮤지컬이 재미있는 이유는, 비록 운명 앞에 선 인물들의 모습은 우울하지만, 인물들의 운명과 춤과 음악이 한데 섞여 ‘축제’의 분위기를 내기 때문이다. 극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그 시점에 다다르면, 제의와 유희가 함께 어우러지는 형태가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비극의 시점인 ‘디튀람보스’는 디오니소스 제전에서 불리어진 노래이다. 디오니소스 제전은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일종의 제사로, 이 제사에서 사람들은 디오니소스의 파란만장한(?) 삶을 극이라는 형태로 재현하며 즐겼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재현한 극 속에는 햄릿처럼, 스스로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운명이 존재하였지만, 그것은 다시 현실 속 너와 나의 이야기였기 때문에, 두려움 보다는 동질감을 느끼며 눈물과 웃음으로 모두 함께 극을 즐겼다. 그리고 이처럼 극을 즐기는 분위기는 음악과 춤, 풍성한 음식들로 인해 한층 고양되었다. 다시 말해 고대 사람들에게 극이란 하나의 축제나 다름없었다.

고대극의 시작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 뮤지컬에는, 아무 것도 없는 무대 한 켠에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과 코러스가 등장하고 인력(人力)으로는 막을 수 없는 운명 앞에 처절하게 굴복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비극을 다시 현실의 즐거움으로 바꿀 수 있는 즐거운 음악이 준비되어 있고, 비록 운명에 굴복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역동적이고 활기차다. 고대 사람들에게 극이 하나의 축제나 다름없었듯, 오늘날의 <2006 락 햄릭>은 끝없는 우울함 속으로 가라앉은 햄릿을 즐거운 축제 속의 주인공으로 노래하고 있다.

2006년 8월 | 세우아트센터

 

유화(stream@thestrea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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